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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위당 장일순

  • 연혁

기어라.開門流下

할 수만 있으면 아래로 아래로 자꾸만 내려가야 한다.

할 수만 있으면 아래로 아래로 자꾸만 내려가야 해요. 한 순간이라도 하심(下心)을 놓치면 안돼. 잠시도 모가지를 세우는 일이 없어야 돼. 개문류하(開門流下), 문을 활짝 열고 아래로 흘러가라 이 말이에요. 기어서 천리를 가라는 말이 있잖아요.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에 대한 철저한 낮춤이 있어야돼요.

모셔라.天地萬物莫非侍天主也

하늘과 땅과 세상의 돌이나 풀이나 벌레나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

해월선생 말씀에 ‘천지만물 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莫非侍天主也)라’ 하늘과 땅과 세상의 돌이나 풀이나 벌레나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 했어요. 그래서 제비알이나 새알을 깨뜨리지 말아야 하고, 풀잎이나 곡식에 이삭이 났을 때 꺽지 말아야 하거든요. 미물까지도 생명이 함께 하신다고 모시게 되면 그 덕에 만물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어요.

함께하라.共生是道

자연과도 공생해야 하지만 제대로 사는 것을 모르는 사람하고도 공생해야 한다.

이제 시대는 공생의 시대예요. 자연과도 공생해야 하지만 제대로 사는 것을 모르는 사람하고도 공생해야 한다 이거예요. 그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가서 만나고 안아주고. 그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렇게 하는 속에서 연대가 되는 거다 이 말이에요.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교육운동

20대에 고향 원주에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역임. 5.16 직후 3년간 옥고를 치른 후 이 사장에 재취임 했으나 1965년 학생들의 전국 최초 한일굴욕외교 반대시위로 이사장직을 박탈당하고 이후 철저한 감시를 받음

협동운동

1966년 지학순 주교와 함께 천주교 원동성당 신자들을 중심으로 ‘원주신용협동조합’을 창립. 이후 진광학교에 협동조합연구소를 만들고, 1973년 남한강 홍수 이재민을 위한 재해대책 사업위원회를 구성하여 46개의 신용협동조합을 만들며 본격적으로 협동운동을 전개함

민주화운동

1971년 원주 MBC 부정부패 사건을 계기로 지학순 주교와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함.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 시인과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본격화함. 이후 원주는 한국 민주화의 성지로 불림

생명운동

50대 중반, 투쟁을 통한 사회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생명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함.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도농직거래 유기농업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원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창립하고, 제기동에서 박재일이 시작한 ‘한살림 농산’ 쌀가게를 지원함. 1989년에는 ‘한살림선언’을 발표함

무위당 장일순 (1928 ~ 1994)

협동조합운동과 한살림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 호(號)는 1950년대에는 호암(湖岩), 60년대에는 청강(靑江), 70년대에는 무위당(无爲堂), 80년대는 일속자(一粟子)로 바꾸어 사용.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은 1950년대 평화통일을 주장한 혁신적인 평화주의자이자 원주에서 대성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요, 사람 얼굴을 담아낸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서화가이기도 하다. 1970년대 원주를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본거지로 만든 정신적 지도자요, 협동조합운동과 한살림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였다. 선생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한 살림의 문명을 주창한 생명사상가로 언제나 시대의 정신, 사회적 변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가진 선생은 늘 세상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았고, 많은 이들이 선생을 찾아와 삶의 지표와 용기와 희망을 얻고 돌아갔다. 시대의 선각자인 선생은 돌아가시고나서 더욱 많은 이들의 스승이 되었다.

무위당 장일순의
역사

무위당 장일순이
걸어온 역사입니다.

  • 1928

    10월 16일 강원도 원주시 평원동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익히는 한편 생명 공경의 자세를 배움. 묵객으로 할아버지와 절친하던 우국지사 차강(此江) 박기정에게서 서화를 익힘.

  • 1940

    원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원동교회에서 세례명 요한으로 영세를 받음. 서울로 유학.

  • 1944

    배재고등학교를 졸업.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에 입학.

  • 1946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핵심으로 하는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이른바 국대안)에 대한 반대 투쟁의 주요 참여자로 지목되어 제적.

  • 1947

    서울대학교 미학과(1회)에 입학.

  • 1950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귀환.

  • 1954

    도산 안창호 선생이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원의 맥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5년간 이사장으로 봉직.

  • 1956

    무소속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

  • 1957

    이인숙과 결혼. (이후 슬하에 3남을 둠)

  • 1960

    사회대중당 후보로 다시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나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낙선.

  • 1961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고,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3년간 옥고를 치름.

  • 1963

    출소 후 다시 대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한일 굴욕외교 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이사장직을 박탈. 이후 정치활동 정화법과 사회안전법 등에 묶여 철저한 감시를 받음.

  • 1966

    피폐해진 농촌과 광산을 살리고자 강원도 일대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함.

  • 1971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사회정의를 촉구하는 가두 시위를 주도하여 70년대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 민주화 운동을 막후에서 전개함.

  • 1973

    전해 남한강 대홍수로 수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와 함께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발족.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된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해 당시 로마에서 주교회의를 마치고 귀국을 준비하던 지학순 주교와 함께 국제사회에 관심과 연대를 호소함.

  • 1977

    지금까지 해오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심함.

  • 1983

    민주세력을 결집하여 통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민주통일 국민연합>의 발족 하는데 일조.

    10월 29일 도농직거래조직인 <한살림>을 창립하고,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생명운동을 전개함.

  • 1988

    한살림 운동의 기금조성을 위해 <그림마당 민>에서 서화전을 개최. 다섯 번에 걸쳐 전시회를 가짐.

  • 1989

    해월(海月) 최시형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원주시 호저면 송곡에 비문을 쓰고 기념비를 세움.

  • 1991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를 발족하는데 고문으로 참여.

    위암 발병으로 수술받음.

  • 1992

    생명사상을 주제로 한 다수의 강연을 개최.

  • 1993

    노자의 도덕경을 생명사상의 관점에서 풀이한 『장일순의 노자이야기』(다산글방)를 이현주 목사의 도움으로 펴냄. 병세가 악화되어 재입원 중 민청학련 운동 승계 사업회로부터 투옥인사들의 인권보호와 석방을 위해 애쓴 공로로 감사패를 받음. 평생의 동지 지학순 주교의 정신을 잇고자 계획된 <지학순 주교 기념사업회> 결성을 병상에서 독려함.

  • 1994

    5월 22일 봉산동 자택에서 67세를 일기로 영면함.

  • 1998

    상지대학교 전시관에서 장일순 유작전이 열림.

  • 2001

    원주 시립박물관에서 무위당 선생 기획전시회가 열림.

  • 2007

    무위당 선생의 사상적 유산인 원주밝음신협 건물 4층에 <무위당 기념관> 개관

  • 2021

    무위당 선생의 생명사상과 협동조합운동을 교육하고 연구하기 위한 생명협동교육관 개관.